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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백천만겁난조우,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수련대회 참관기,구인사 칠불사 견문기,자장암의 금개구리,홍련암 해돋이,응작여시관,나무묘법연화경

硯友 2020. 2. 10.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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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百千萬劫 難遭遇 ; 백천만겁 난조우)>

 

 

 

필자가 불교와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은 20초반 논산훈련소에서 였다.

훈련소에 입소하여 몇 주간의 훈련기간이 경과하고 일요일이 되자 종교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단지 거듭되는 작업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어서 속칭 기독교 환자·불교 환자·천주교 환자 모이라는 소리에 뛰어나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불교 환자 줄에 서서 제일 뒤에 따라갔다.

 

막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저멀리 앞에는 법사인 듯한 분이 무슨 설법을 하고 있었고 법당을 가득 메운, 머리를 박박 깎은 나와 비슷한 젊은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여기저기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뭉클함을 맛보았다.

 

"! 이 길이 내 길인 것을……"

그날의 감격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제대 후 나는 불광회 대학부에 소속되어 약간의 활동을 했으며, 그 이후로는 줄곧 개인적인 수행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20중반 처음 수행(修行)을 시작할 때에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묵조선(默照禪) 수행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줄곧 화두를 드는 간화선(看話禪) 수행을 하며 나름대로의 수행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그런 중에서도 학업을 하는 약 십여년 동안 아침에 일어나 한시간 정도 정진을 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짐없이 거의 매일새벽 대구 앞산 은적사나 안일사에 가서 절을 하고 기도를 하였으며, 일주일에 한번 이상씩 새벽에 갓바위엘 다녔다.

 

그런데 좌선을 할수록 잠이 많이 오고 자꾸만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86년 부터는 지장보살을 마음 속의 주불(主佛)로 모시며 수행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갓바위에 가는 날은 약사여래불 염불을 하고 관음재일(매달 음력 24)에는 관세음보살 염불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지장보살 염불만을 하였다.

 

그러나 지장보살님과는 연줄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지, 꿈속에 자주 잡신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는 깊은 고민에 빠져 많은 생각을 해본 결과, 나는 관세음보살님과 인연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2년간의 지장보살 염불을 마치고는 관세음보살 염불을 했다.

 

 

관세음보살을 마음속으로 계속 그리며 염불을 해오면서 느낀 점은, 직접적인 관세음보살의 출현은 볼 수가 없었지만, 내가 살아나가는 가운데에 항상 어려운 시련을 겪고나면 좋은 인연이 생기거나, 내가 직면한 문제가 꼬이는 일이 있다가도 가장 적절한 때에, 관세음보살의 화현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해결해 주거나 일이 저절로 풀려버림을 절실히 느꼈다.

 

필자의 도반(道伴) 중에 대구 약전골목에서 <세원당 약업사>를 운영하는 김백용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 부부는 결혼하기 전에 대구 수성못에서 금빛 찬란한 부처님 몇분이 떠오르는 것을 동시에 친견하고는 결혼했다.

 

또 금강경 독송회의 김재웅 법사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백두산에서 관세음보살을 동시에 친견한 일도 있다고 하니 사람에 따라서는 부처님이 직접 출현하시는 경우도 있는가 보다.

 

필자는 관세음보살 염불을 한 후, 몇 년 뒤에는 묘법연화경 독송을 한 적도 있었고, 지금은 일종의 염불선(念佛禪)이라고 할 수 있는 옴마니반메훔 염불을 하고 있다. 관법(觀法)에 따라 을 하며 염불을 하면 아무리 피곤할 때 하더라도 졸음이 오질 않는다. 염불선 수행을 제대로만 하면 졸음이 싹 가실 정도의 수승한 수행법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염불을 하며 느낀 점은 관세음보살과 나무묘법연화경과 옴마니반메훔은 맥을 같이 하고있다는 것이다.

 

옴마니반메훔은 온 우주에 충만하시고 진리·이치·빛 그 자체이신 법신불(法身佛 ; 비로자나불)의 본심진언(本心眞言)이자 모든 보살님과 뭇 중생들의 本心眞言이며, 관세음보살은 이 법신불의 과보로 오신 보신불(報身佛)이며, 묘법연화경(법화경)은 법신불이 인간으로 나투셔서 우리들에게 이러한 진리를 전하신 화신불(化身佛 ; 應身佛, 應化佛)인 석가모니가 열반하기 전 몇년동안 설법하신 최상승의 경전이다.

 

관세음보살의 어머니가 바로 묘법연화경이고 관세음보살의 本心이 바로 옴마니반메훔이다.

 

사람마다 근기가 다 다르다. 수행인(修行人)은 앞서간 사람들을 참고할 필요는 있지만 꼭 그대로 할 필요까지는 없다. 자기의 근기와 시절인연에 가장 잘 맞는 수행법을 선택해 진리를 향해 나아가면 된다.

 

현재 우리들 중에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 종교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고, 또한 자기와 자기가족들의 복만 빌고있는 사람들이 많다. 종교적인 수행은 하루도 빠짐없이 평생동안 지속되어야 하고 한 순간도 그 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상태가 아니라 修行하는 그 자체가 좋아서 기도하는 상태가 되어야 하고, 모든 생명체가 대자연을 구성하는 동체임을 체득해야 한다. 진정으로 다른 생명체를 위해주는 일이 바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자 진리에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복을 받기위해 다른 사람을 위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남을 끝없이 위하는 마음 그대로가 修行人의 도리이다. 자기는 베풀었는데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마음이 상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아상(我相)을 없애야 한다. 내가 믿는 종교가 최고요 나의 기도방법이 최고라고 믿는 사람도 그 我相을 때려부수는 일이 진리에로 접어드는 제일 첫째의 관문이 된다.

 

수행을 해나가더라도 재난이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본인이나 주위의 분들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이 세상은 끝없이 윤회하는 것이다. 내가 수행을 해나감으로서 전생과 현생에서 두껍게 쌓아온 업장들이 조금씩 풀려가기도 하고, 내가 떠날 때가 되면 어떠한 형태로든 이 세상을 떠나서 자기가 쌓아온 업에 의하여 다음 생을 받든지, 또는 그런 윤회의 고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열반의 경지에 들게 된다.

 

사람 몸을 받기도 어렵고 더군다나 수승한 진리를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우주의 진리 그 자체인 佛法은 백천만겁을 다시 태어나도 만나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다행히 금생에서 이 불법을 만난 사람들은 자기의 근기와 시절인연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해서 죽을 때까지 간궐없이 수행해 나아가면 된다.

 

참선(參禪)을 하든 독송(讀誦)을 하든 염송(念誦)을 하든 사경(寫經)을 하든 절을 하든 一心으로 하다보면 현세에서 점차 공덕을 입을 뿐만 아니라, 만약에 다음 에 사람몸을 다시 받는다면 지금보다는 더 좋은 환경과 더 좋은 몸으로 태어나리라.  

 

 

 

 

<산사의 종소리(해인사 수련대회 참관기)>

 

올 여름에도 나는 며칠 동안을 山寺엘 다녀왔다.

은은하게 번지는 종소리의 여운에 젖어들어 거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이번에는 어느 곳보다도 자주 찾는 해인사(海印寺)로 향했다.

매년 그러하듯이 山寺의 첫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샜다. 밤새 속삭이며 성내며 울며 웃으며 흘러가는 계곡물 소리를 귀로 마음으로 받으면서 말이다.

 

먼 바다를 향해서 저렇게 바쁘게도 달려가건만, 이내 다시 나그네가 되어 파란 하늘을 배회하다 다시 고향을 찾아 돌아가게 될 물 ---- 너는 나에게 멀고 먼 윤회의 길을 안내하는 커다란 몸짓인가? 아니면 끝없는 번뇌의 사슬을 끊지 못해 안타까이 몸부림하는 하소연인가?

 

독경소리가 들린다. 청아한 목소리가 山寺의 새벽을 연다. 퐁퐁퐁 솟아나는 샘물로 얼굴을 적시자 두웅둥 북소리가 와 닿는다. 善男子 善女人들과 더불어 어둠을 헤치며 큰 법당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번뇌의 계단을 올라갔다.

 

이제 범종이 울린다. 어두움을 가르며, 온 가람으로 땅속으로 천공으로, 구르며 달리며 울려번진다. 뭇 생명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진리의 빛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은은한 여운을 길게 드리운다.

 

백팔참회를 하고 좌선에 들어갔다. 반가부좌를 틀고 호흡조절을 하고 나의 화두(話頭)를 붙잡았다. 죽은 글자를 마음으로 살려내는 작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니, 살려내겠다는 내 마음자세 부터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죽어있는 것도 살려낼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살려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또 하나의 번뇌가 되어 나를 조여오는 것이다.

 

설사 살려보겠다 하더라도 내가 해인사에 머무는 짧은 기간동안은 될 일도 아니다. 어쩌면 평생을 두고 더듬어 나가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시작된 좌선은 우리가 해인사를 떠나오는 날까지 시간만 나면 계속되었다.

 

평생을 두고 참구해도 된다는 느긋함으로 인해 마음은 편안하다.

지나간 뭇 일들이 엎치락 뒤치락 물고 물리며 돌아간다.

저리는 다리를 풀어보기도 하고 자청해서 어깨죽지에 죽비도 맞아본다.

 

그럴수록 마구니는 더욱 다가만 오는 걸 어찌하겠는가.

아름답지 못한 온갖 자태를 드러내면서 내 주위를 맴돈다.

그래 마구니 너희를 사랑하기로 하자. 네놈들이 내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들을 사랑해 버리면 될게 아니냐.

 

이제 꾸벅꾸벅 졸음이 온다. 탁탁 죽비소리에 화들짝 놀라 다시 화두(話頭)를 붙잡는다.

 

한가한 시간에 계곡으로 내려가 맑디맑은 물에 발을 담갔다.

달려가는 물은 세속에 물든 마음마저 달라고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이 몸이 이승의 인연을 다하는 그때서야 가능하겠지.

 

물에서 나와서 바위에 올라앉았다. 가끔씩 찾아오는 이 손님이 자기를 눌러앉아도 버릇없음을 나무라지를 않고 말없는 인사로 맞아준다. 이 땅의 주인다운 포용력을 발휘하는가 보다.

 

사실 물과 돌과 흙---- 이들이 우리 지구의 주인이 아니던가? 그네들은 자기들이 주인이면서 우리들 손님네들이 주인노릇 할려는 아집을 빙긋이 웃음으로 받아들인다. 손님들이 하는대로 그저 모습만 바꾸어가며 몸을 내맡기지만 언제 어디서나 이 지구를 지키는 영원한 주인은 바로 그들인 것이다. 시공적 유한성(時空的 有限性)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들 사람은 그 주인자리를 차지해 보려고 그저 안달이다.

 

별이 빛나는 밤이다. 산사(山寺)의 여름밤은 물소리·산벌레소리·바람소리에 반짝이는 별빛까지 해서 운치가 한층 더하다.

 

윙윙거리는 모기가 겁도 없이 달려붙는다. 집에서라면 그대로 철썩 쓸어버리겠건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어디 그럴수야 있겠는가. 귀찮은 미물일지라도 내 맘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자비심을 발휘해 보기도 한다.

 

이제 은은한 종소리가 번져온다. 가 빚어내는 합창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 丙寅어느 여름 날에 -- 

 

 

 

 

<자장암의 금개구리(金蛙菩薩 ; 금와보살)>

 

며칠동안 억수같이 내리던 비가 그친 다음 날, 나는 무불상(無佛像)의 제일 가람 통도사(通度寺)로 향했다.

 

비갠 후의 영축산은 바위들이 하늘의 햇살을 반사해 그야말로 장엄국토 그대로였다. 무풍교(舞風橋)를 지나자 왼쪽으로 이번 비로 내린 물을 쏟아내리는 시냇물 소리가 쿵쾅쿵쾅 들린다.

 

야단법석으로 떠드는 냇물소리를 들으며 평탄하게 죽 뻗은 신작로를 따라 한 오리쯤 걷자니까 불지종가(佛之宗家)의 일주문(一柱門)이 나온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곳 통도사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우리 일행은 수련대회에 참석하러 왔는지라 화엄전과 원통방에서 며칠을 지낸 어느 날 오후에 수련생 모두가 같이 자장암으로 금개구리를 보러 갔다.

 

자장율사가 처음 영축산에 와서 통도사를 창건하기 전에 기거했던 이곳 자장암은, 본당(本堂)에서 아스팔트 농로(農路)를 따라 1킬로쯤 걷자면 Y형의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이 극락암·비로암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난 길을 죽 따라가면 있다.

 

자장이 통도사를 짓기 전에 이곳 석벽 아래에서 움집을 짓고 수도(修道)를 할 때의 일이다. 어느날 그가 공양미를 씻기 위해 석간수(石間水)가 고이는 곳에 이르자 개구리 한쌍이 그곳에서 샘물을 흙탕물로 만들고 있었다. 자장은 그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공양미를 씻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 개구리 한쌍은 계속해서 샘물을 흐려놓았던 것이다. 그제서야 유심히 그 개구리를 본 자장은 그들이 보통 개구리와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입과 눈가에 금빛 테가 둘려 있었고 등에는 거북모양의 반점이 있었다.

 

자장은 그들이 불연(佛緣)에 의해 태어난 것임을 깨닫고 그들이 머무를 곳을 정해줄 생각으로 그곳 바위에다 구멍을 뚫어 넣어 주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믿을 수 있는 일인데, 안내판에 나오는 그 다음 말이라든지 그 밖에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금개구리의 신비에 대해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그때의 그 금개구리가 지금까지 살아서 혹은 벌이 되기도 하고 혹은 나비로 화하기도 하며 혹은 거미로 화하여 기어다니기도 한다는 것이다.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금개구리를 보기 위해 줄을 섰다. 먼저 들여다본 사람들의 반응이 각양각색이었다. 바로 입구에 개구리가 있다는 사람, 개구리가 목을 가늘가늘 거리며 숨을 쉬고 있다는 사람, 개구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와 하는 사람, 그냥 보인다며 무덤덤한 사람…….

 

들여다본 사람들의 거의가 다 개구리를 보았노라고 한다. 정말 보았는지 아니면 남이 보았다고 하니까 덩달아 보았다고 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내 차례다. 심호흡을 하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캄캄하기만 하고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다시 눈을 부릅뜨고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샅샅이 훑어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러나 뒷 사람들이 밀렸으니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뒤에서는 연신 보이는지를 물어댄다. 나도 모르게 그냥 고개를 끄떡끄떡하고 내려왔다.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따가운 햇빛을 견디기가 힘들었지만 다시 꼴찌에 줄을 섰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투명한 셀로판지에다 햇빛을 반사시켜서 들여다 보았다. 또 안 보인다. 앞이 캄캄했다. 내려와서 다시 줄을 서니 같이 왔던 도반(道伴)이 그만 가자고 성화다. 하지만 나는 꼭 개구리의 유무(有無)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살며시 들여다 봤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입가에 금테가 뚜렷하고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개구리가 나를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도 당황을 해서 더 이상의 관찰은 할 수가 없었다.

 

내려와 주위를 눈여겨보니 개구리가 도저히 드나들 수 없는 높이일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90도의 경사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출입(出入)은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러면 혹시 뒤로 구멍이 뚫려 있을까 해서 바위를 바라보니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워낙 큰 바위인데다 바위의 옆과 뒷부분까지 볼 수 있었지만 석혈(石穴)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저 바위안의 개구리는 어떻게 해서 저기에 있을까? 혹시 빛의 반사에 의해서 개구리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다시 줄을 섰다. 내 앞의 아주머니가 데리고 온 3명의 아이를 내가 들어다가 개구리를 보게 해 주었더니 한결같이 있다고 소리쳤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약간의 물이 고여있고 녹색을 띤 역삼각형 모양을 한 개구리의 머리와 앞발 부분이 선명히 보였다. 그런데 개구리의 성낭 주머니가 할딱할딱 움직이는게 아닌가. 살아있음이 분명했다.

 

이러한 신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다음날 새벽에 나는 혼자서 영축산의 계곡을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 목욕재계를 하고 다시 자장암으로 갔다. 조용히 石穴을 들여다봤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번에는 보이질 않았다. 분명히 어제 그 위치가 어렴풋이 보이는데도 개구리는 흔적도 없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주로 오후에 햇살이 길게 비칠 때 개구리를 본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곳 스님의 얘기에 의하면 이십년을 개구리를 보러오는 신자가 있는데도 아직 못 봤다고 한다. 또 어떤 때는 개구리가 삼사년동안 출현을 하지 않을 때도 있다고 한다.

 

통도사를 다녀온지 두달 가량이 지나고 나는 도반(道伴) 한사람과 다시 찾아갔다. 더 없이 맑고 푸른 하늘에 뭉게뭉게 흰구름이 영축산을 빙둘러 흘러가는, 햇살이 따사로운 가을날의 오후였다.

 

문제의 금개구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지난 번에 고여있던 물은 없었고 전에는 녹색이었던 개구리가 자세히 보니 갈색바탕에 드문드문 검은 점이 있는 개구리가 되어 있었다. 성낭주머니가 지나치게 커서 땅에 닿아 있었고 뒷발 부분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부처님이시여! 이 금개구리를 영원히 살아있게 하소서.

 

   -- 己巳年 開天節--  

 

 

 

 

<홍련암의 해돋이(관세음보살의 위신력)>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는 강화도 보문사와 남해의 금산 보리암,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이다.

보문사는 대구와는 멀어서 언젠가 3일기도인가 7일기도인가를 한번 한 적이 있는데, 그곳의 관음굴에서 제대성중(諸大聖衆) 염불을 했다.

 

남해 보리암은 가까운 관계로 여러번 기도를 다녔다. 고등학교때 수학여행 갔을 때는 낙산사에는 갔지만 홍련암에 갔는지 안 갔는지는 생각이 안난다. 언젠가 낙산사·월정사를 거쳐서 상원사에 기도하러 갈 때, 앞으로 시간을 내어 홍련암에 와서 꼭 해돋이를 보고싶었다. 그렇지만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참고로 홍련암 입구에 있는 철운 조종현 대선사 시조비(鐵雲 趙宗玄 大禪師 時調碑)를 소개하고자 한다.

 

 

[의상대 해돋이]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것 좀 보아

 

후끈하지 않은가

 

 

당시에 나는 대구에 있는 외국어학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4일간의 음력 설연휴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그때 마침 상인동 지점 이전 개원준비 때문에 이틀밖에 휴가를 주지 않았다.

 

오랫동안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이틀연휴 첫째날에 볼 일을 보고 집에 가서 어머니와 같이 때이른 저녁을 먹고 오후 5시경 홍련암을 향해서 차를 몰고 갔다.

 

밤길에다 초행길이라서 천신만고 끝에 11시간 만인 새벽 4시에 홍련암에 도착해서, 아침예불을 올리고 마침 설날이라 차례행사에 참여한 후 아침공양을 마치고, 고대하는 해돋이를 보려고 기다렸지만 그날따라 구름에 가려 장엄한 일출광경을 보지 못했다.

 

우리 집은 양력설을 쉬고 음력설에는 형제들이 고향가서 차례를 지낸다. 나는 미혼의 노총각으로 도저히 고향을 갈 수가 없어서 몇 년 전부터 인가 고향에는 잘 가지않고 대신 절에 가는 것이 상례였다.

 

해돋이를 못봐서 실망도 되고 또 졸음이 왔지만 낮에 운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바로 차를 몰고 대구로 향했다. 운전하다가 조금씩 쉬다가 하면서 삼척에서 울진으로 가는 산악길을 갈 때, 버스뒤에 따라가다가 추월을 하여 커브길을 돌면서 순간적으로 깜빡 졸았는지 눈을 뜨니까 커다란 차가 내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 중앙선을 침범했다는 직감과 함께 너무 놀라 브레이크 밟을 여유도 없이 핸들을 왼쪽 길가로 확 틀었다.

 

다행히 충돌은 피하여 내 차는 낭떠러지가 아닌 수로에 처박혔고 양 사방에서 운전자들이 내려 뛰어왔다. 나하고 충돌할뻔 했던 트럭기사는 아예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내가 엉금엉금 기어나오니까 모두들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전벨트를 해서 그런지 몸은 하나도 안 다치고 차만 폐차시켰다. 당시에 울진에 살고있던 고등학교 동기에게 들은 얘기로는 삼척 울진 간 7번 국도 산악구간에서 사고가 났다하면 거의가 사망 아니면 중상이라고 했다.

 

뒤에 그 학원을 그만두고 홍련암에 3일기도를 갔는데 3일 내내 비가 와서 역시 해돋이보기 소원성취를 못하였다. 그때, 홍련암에 왔다가 집에 가는 길에 사고를 당했는데 절에 온 보람이 없었다고 했더니, 그곳의 보살님들이 절에 왔기 때문에 내가 무사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더 큰 사고를 당했을텐데 그것이 액뗌을 한 것이라 했다.

 

다시 한달 뒤(1995가을)에는 마침 그즈음 운영하던 공장을 정리하는 도반 한사람과 추석연휴에 7일기도를 하러갔다.

 

입재 전날 밤늦게 도착해서 입재하는날 아침예불에 참석하니까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있길래 그옆에 가서 예불을 올리는데, 그날따라 예불이 길어서 내리 세시간 이상 절을 하는데 창문밖에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장엄한 해돋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예불을 그만두고 나올 수가 도저히 없어서 그대로 기수를 창문쪽으로 돌려 해돋이를 향해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그 노란옷은 내 엉덩이 부근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절을 하는데 도반이 쿡 찔렀다. 뒤쪽의 어느 보살님이 뭐라 하니까 기수를 바로 돌리라고 했다.

 

너무너무 아쉬웠지만 기수를 바로 돌려서 예불을 마치고 보니 옆의 노란옷은 일붕 서경보 스님이었다. 오늘이 기도 회향하는 날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지극정성으로 절을 하셨고, 아침예불 후 그곳에 모셔진 여러 영령들을 위해서 재를 올리는데 우리도 동참하여 같이 올리고, 떠나시는 큰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그 기도 기간동안 몇번인가 더 장엄한 해돋이 구경을 하였다.

 

그 다음해(1996년)에 일붕 스님이 열반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팔순의 그 연로하신 연세에 젊은이 못지않게 어떻게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절을 하실 수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 지금도 의문이다.

 

외람된 얘기지만 여기서 불교적 소재를 즐겨 사용하는 詩人 한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고은아 시인은 1994에 대구의 출판사 파란나라에서 간행한 그녀의 처녀시집 하늘북소리를 간행했는데, 이 시집(詩集)은 불교사상의 토대위에 사랑과 구도와 방황을 자기고백적인 따뜻한 언어로 이루어냈으며, 젊은 날의 구도적 삶을 그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늘북소리에 나오는 고은아 시인의 머리말이 우리들의 구도(求道)의 자세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일부를 여기에 인용하고, 이어서 그녀의 한 수를 음미해 보도록 하자.

 

"한 권의 시집으로 묶고 보니 부족함이 많습니다. 내 삶의 흔적들이 그림자처럼 선명히 찍힌 낯 뜨거운 부분들도 있고 한 생을 뜨거운 구도(求道)의 마음으로 살리라는 기도도 있고 눈물겹게 그리운 것들에 대한 고백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아직도 바람 앞에 흔들림 많은 저의 꾸밈없는 모습 그대로 입니다. 허나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노래하다 보니 공부의 부족함이 감출 수도 없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 부끄러움 때문에 저는 맑은 노래 기쁜 노래 뜨거운 노래 부르리라 세운 원() 앞에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중 략>

 

오늘도 하늘북소리 둥둥 울려 퍼질 날을 기다리며 첫 시집을 삼보(三寶) 전에 바칩니다."

 

 

낙산사 홍련암에서

 

                                          --- 고 은 아 ---

 

 

어디에서부터 펼치고 누운 푸르름인가

어디에까지 잇닿아 있는 장삼자락인가

 

소매는 넓어 바다를 짓고

붉은 가사로 절 지으매

 

의상대사 눈물로 이룬 동해의 절정이여

우뚝 선 해봉 살아 있는 성전이여.

 

천폭이나 만폭이나 풀어헤친 동해

파도조차 숨 죽인 채 바람 속에 묻혀오는,

죽음으로 맞이한, 관음보살의 미소

 

사바(娑婆)의 끝없는 전설 속에 바다가 익고

생성하는 바다에 밤새 씻기워 돋는 해,

 

그대는 금새 피어난 홍--

 

, 노을로 번지는 열반의 언덕이 여기인 것을.

 

내 몸뚱이 던져 꽃으로 핀다면

어느 하늘 어느 바다 가리랴마는

 

처음 산이 열리어 설악이 되고

홀로 떨어져 바다가 시작된 곳 낙산사,

 

홍련암은 어떠할까?

 

바다는 관음의 마음이요

바람은 관음의 말씀이며

파도는 관음의 행동이신 동해안 제일봉

 

--암 관음의 집이어라.

 

 

 

 

<소백산의 관세음보살(구인사 견문기)>

 

며칠 전의 크리스마스는 마침 연휴라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충북 단양에 있는 소백산 구인사(小白山 救仁寺)로 향했다. 단양에서부터 붐비기 시작했지만 연휴라서 사람들이 좀 많이 왔겠구나 생각하고 구인사행 버스를 탔다.

 

내가 탄 버스는 앞에 밀린 차량행렬로 인해 종점까지 갈 수가 없었으므로 도중에 하차해 눈이 와서 질퍽질퍽한 길을 조심조심 걸어 올라갔다. 길 전체를 가득 메운 차들도 많았지만 구름같이 올라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그날이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날이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크리스마스 날이 바로 천태종(天台宗)의 중창조(重創祖)인 상월조사(上月祖師)의 탄신일이었다. 절안의 모든 곳은 발디딜 틈이 없었으며, 복도·계단은 물론이고 어느 한곳 자리잡고 앉을 만한 곳이 없었다.

 

여지껏 내가 본 중에서는 제일 큰 식당에서 죽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저녁공양을 마치고, 그래도 비집고 들어설만한 자리를 찾아 소백산(小白山)을 가득 수놓은 연등을 구경하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몇바퀴를 돌았지만 내가 앉을만한 약간의 공간도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할 수 없이 노천에서 철야정진 하기로 작정하고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반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대법당 앞의 탑으로 가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을 하며 탑돌이를 했다.

 

탑을 돌자니까 곳곳의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염불소리가 다양한 뉘앙스를 가지고 들려왔다. 한참을 지나니까 구인사 전체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더니만 나중에는 小白山이 우렁차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느낌을 받았다.

 

천태종(天台宗)은 중국의 지자대사(智者大師 ; 지의智顗스님의 法號, 538597)로 부터 시작한다. 지의스님이 중국 남쪽의 天台山에서 9년간 수도한 후 각도(覺道)하여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운동을 전개했는데, 지자대사가 수행했던 천태산을 종명(宗名)으로 하여 天台宗이라 하게 된 것이다.

 

천태종이 우리나라에서 한 종파로 출발한 때는 1097년 고려 文宗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으로부터다. 그후 400여년간 융성하다가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선교 양종(禪敎 兩宗)의 통폐합시(1424) 천태종은 종파로서의 맥이 끊겼다.

 

500여년간 종파로서의 자취도 없이 내려오다가 20세기 중반 朴上月 스님에 의해 중창(重創)되었다. 해방 이듬해에 지금의 구인사 대법당 자리에 상월조사가 초암을 짓고 수도(修道)에 전념하기 시작한지 불과 수십년만에 규모면에서 한국제일의 사찰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이 상월조사와 구인사를 통해서 나았다는 얘기들을 여러 경로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있을 자리도 마땅찮고 춥기도 하고 해서 반쯤 녹은 눈에 길은 질퍽질퍽했지만 적멸궁이라고 불리는 상월조사의 묘소에 참배할려고 소백산으로 올라가고자 했지만, 길이 험한데다 눈이 왔기 때문에 야간에는 통제를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이빨을 덜덜 떨어가며 노천에서 철야정진을 하고 새벽 3시가 조금 지나 적멸궁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도 숱하게 있었다. 밧줄을 잡고 앞사람 뒤를 따라 눈길을 한걸음 또 한걸음 옮기다가 주루룩 미끄러지는 사람도 보인다.

 

구도(求道)의 길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우리 몸은 다 헤쳐나갈 수 있지만, 우리네 마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보다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부처님도 出家하신 후 처음에 육체적인 고통은 극한적인 상황까지 다 참고 견디신 후, 그러한 고행(苦行)을 통해서 다져진 수행력(修行力)으로 대각(大覺)의 선정(禪定)에 드신 것이다.

 

한사람 한사람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같이 온 도반들끼리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산소가 가까와 오는지 관세음보살 합창소리가 어둠을 뚫고 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벅차게 울려온다.

 

이런 험난한 지역에 거동이 불편한 노인네들이 엉금엉금 기듯이 오르내린다. 저분들을 부처님의 국토(國土)로 편안하게 인도해 주소서.

 

    觀世音菩薩! 觀世音菩薩!

 

    -- 庚午年 元旦(11)--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의 올바른 이해>

 

부처님 은 한마디로 속지 말라는 것이다.

에도 속지 말고 사람에게도 속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도 속지 말라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의 진리(眞理)이다.

 

 

금강경의 제1 사구게,

 

凡所有相(범소유상)

皆是虛妄(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

則見如來(즉견여래) --- [5 如理實見分(여리실견분)]

 

"무릇 있는 바의 모든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에 모든 아닌 줄을 터득한다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니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실제로 부처와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 아니다. 바로 허망한 을 없애라는 뜻이다. 글에도 속지 말고 말에도 속지 말라.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의 이 글에 속지 말기를 바란다. 오직 스스로 깨쳐서 증득해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중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四相)에 매여있는 사람이 많으며, 필자처럼 법상(法相)이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들에 사로잡혀 있는 한 보살도 아니고 각자(覺子)도 아니다. 금강경의 제3 사구게에 나오는 말처럼 헛된 를 행하는 사람일 뿐이다.

 

 

2 사구게,

 

不應住色生心(불응주색생심)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應無所住(응무소주)

以生其心(이생기심) --- [10 莊嚴淨土分(장엄정토분]]

6조 혜능대사가 이 구절을 듣고는 탄복을 하였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응당 색(물질 세계)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3 사구게,

 

若以色見我(약이색견아)

以音聲求我(이음성구아)

是人行邪道(시인행사도)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 --- [26 法身非相分(법신비상분)]

 

"만약에 그 어떤 모습으로 부처님이나 하나님을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나(하나님, 부처님, 진리)를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헛된 를 행하는 사람들이니

능히 나를 볼 수 없을지니라."

 

그 어떠한 도 다 버리라는 것이다.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의 마음에 담고 있는 모든 을 놓아버리라는 말이다.

 

 

4 사구게,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응작여시관) --- [32 應化非眞分(응화비진분]]

 

"일체의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음을 (마음눈으로 볼)지니라."

 

 

이러한 경계를 터득하여 볼 줄 알아야만 참 불자(佛子)라고 하겠다.

모든 현상은 유심소현(唯心所現)이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참고로 화엄경 야마천궁 게찬품에 나오는 사구게를 한번 보자.

 

若人欲了知(약인욕료지)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

應觀正觀察(응관정관찰)

心造諸如來(심조제여래)

 

"만약에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알려고 한다면,

응당히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든다는 것을

바르게 관찰하여 볼지니라."

 

<應作如是觀>의 이 부분은 많은 말이 필요없다.

부처님의 경전에 나오는 진리(眞理)의 말씀들을 곰곰히 마음에 새겨 끊임없이 되새김질 하는 것이 올바른 佛子가 되는 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무묘법연화경(월간 불광 20009월호에 수록)>

 

필자는 금강경 다음으로 법정스님이 번역한 화엄경을 즐겨 보곤 하다가 우연히 대구 북성로에 있는 대성사에서 실시하는 법화경 산림법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열흘간 설법하는 중에 회향하는 날이 내가 송광사 수련대회에 가는 날이라 참석할 수가 없었는데, 회향날에 우리가 같이 보던 법화경을 나누어준다고 하길래 아쉬웠지만 수련대회 다녀와서 한 권 받을 생각이었다. 그 법화경이 내가 본 다른 책들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었다.

 

그런데 수련대회를 다녀오니 그 법화경이 한권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대구 반월당 일대의 불교서점을 샅샅이 뒤져서 마음에 드는 그 법화경을 찾았지만 구하지 못하고 제일 끝으로 삼영불교서점에 들렀다.

 

그 책은 없었지만 마음에 드는 세 종류를 앞에 놓고 망설이다가 결정할 수가 없어서, 그곳 주인한테 한 권을 선택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제일 가격이 싼 책을 골라주었다. 내가 서점주인이면 당연히 비싼 걸로 골라주지 싶은데 왜 제일 싼 걸로 권하냐고 물었더니, 그 법화경은 제목이 한글로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정성이 아주 많이 깃들인 책이라고 했다.

 

그 책의 번역자인 석묘찬 스님은 책이 출간되기 전에 열반하셨지만 그 스님이 그 책을 번역할 때 자기가 그 절(경남 진양군 해룡사)에 머물렀었는데, 정말 옆에서 봐도 信心이 절로 우러나올 정도로 지극히 공을 들여 그 책을 번역했다고 한다.

 

필자는 그 책으로 그 후 몇 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독송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독송했는지 모른다. 한글본과 한문본이 합본으로 되어있는데 나는 한문본은 사경을 한번만 하고 독송을 할 때는 한글본으로 했는데 부산의 도서출판 <위음왕>에서 간행한 책이다.

 

분량도 많고 어려운 단어도 많았지만 사경을 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져 갔다. 독송을 할 때는 아침 저녁으로 약 한시간씩 했는데, 횟수를 헤아리지 않고 독송했으며 나중에는 거의 외다시피 했다. 그 외의 시간은 늘 나무묘법연화경 염송을 했다.

 

관법(觀法)에 따라 을 하며 염송을 하면 아무리 피곤할 때 하더라도 졸음이 오질 않는다. 염불선 수행을 제대로만 하면 졸음이 싹 가실 정도의 수승한 수행법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독송과 염송을 하며 느낀 점은 관세음보살과 나무묘법연화경과 옴마니반메훔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옴마니반메훔은 온 우주에 충만하시고 진리·이치·빛 그 자체이신 법신불(法身佛 ; 비로자나불)의 본심진언(本心眞言)이자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님과 뭇 중생들의 本心眞言이며, 관세음보살은 이 법신불의 과보로 오신 보신불(報身佛)이자 모든 중생들의 자애로우시고 생명의 고향이신 어머니이시며, 묘법연화경(법화경)은 법신불이 인간으로 나투셔서 우리들에게 이러한 진리를 전하신 화신불(化身佛 ; 應身佛, 應化佛)인 석가모니가 열반하기 전 몇년동안 설법하신 최상승의 경전이다.

 

관세음보살의 어머니가 바로 묘법연화경이고 관세음보살의 본심(本心)이 바로 옴마니반메훔이다.

 

그렇게 나무묘법연화경을 인연하여 정진하는 가운데에 부처님의 전당에서 녹을 먹으며 살아나가는 길이 열렸다. 지금 부처님의 법을 전하며 보람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나무묘법연화경의 정진 공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가 살펴보니 북한산의 영산법화사에서도 '나무묘법연화경' 염송을 하고 있었고, 조계사 근처에서도 하고 있었다. 법장(法藏) 큰스님이 매달 첫째 토요일에는 충남 부여군 세도면에 있는 本佛寺에서 '나무묘법연화경' 염송 철야정진을 지도하며, 조계사 근처에서도 가끔씩 법화경 강설을 했는데 필자도 참석했다.

 

丁丑年(1997년) 여름휴가 때 필자는 본불사에 내려가서 12일간 정진을 하고 그해 추석휴가를 그곳에서 지냈다. 거기에 갈려면 충남 강경에서 세도면까지 버스로 가서 택시로 본불사까지 가면 된다. 32천여평의 조용한 산속의 대지에 가건물 몇동이 들어섰는데, 필자가 보기에 앞으로 대가람이 들어설 터 임에 분명했다.

 

그곳에서는 불상(佛像)을 모시지 않고 글자로만 삼존불(三尊佛)을 모시는데, 로부터 '본문(本門)묘법연화경' '서가모니본불(本佛)'일체본화(本化)보살님'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며 '나무묘법연화경' 염송만을 하는데, 아직까지(1997가을) 팻말 하나 없는 사찰이지만 전국 각처에서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있는 상황이다.

 

필자는 法藏스님이 직접 번역하고 편찬하신 <나무묘법연화경>과 석묘찬 스님의 앞에서 말한 <나무묘법연화경>, 묘법연화경 독송을 할려는 분들에게 권해드리고 싶다. 이 책들을 인연하여 많은 분들이 참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서원드리는 바이다.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 칠불사(七佛寺)>

 

언젠가 조계사 대승불자회(大乘佛子會)에서 지리산 칠불사·쌍계사·천은사에 12일로 기도를 떠났다. 칠불사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정근으로 철야정진을 하고 통광(通光) 주지스님의 기도에 대한 설법을 들었다.

 

七佛寺 사명(寺名)의 유래는 가락국(駕洛國)의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허왕후(許王后) 사이에 태어난 10王子중 제4로부터 제10에 이르는 7王子가 외삼촌을 따라와서 修道하여 모두 成佛하였기 때문에 칠불암(七佛庵)이라고 한다.

 

이 절에는 스님들이 수선(修禪)하던 아자방(亞字房)이란 유명한 온돌방이 있는데, 한번 불을 때면 50동안이나 방이 고루 뜨뜻하여 세계건축연감에도 실려있다. 이 온돌방은 曇空禪師(담공선사)가 설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스님들이 좌선하다 발이 저리면 낮은데로 내려놓고 있으면 금방 낫는다고 한다.

 

亞字房은 옛부터 참선승 이외에는 출입을 엄격히 제한해왔는데, 이조중엽에 새로 부임한 하동군수가 쌍계사에 초도 순시차 왔다가 꼭 亞字房을 보고 가겠다고 하여 찾아와 억지로 문을 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때는 늦봄이라 방금 점심공양을 마치고 졸음에 몰려 앉아있는 스님들의 꼴이, 혹자는 하늘을 쳐다보고 졸고있는가 하면 혹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을 들여다보면서 끄떡끄떡 졸고있었으며 어떤 이는 방구를 팅팅 뀌면서 졸고있는 등 말이 아니었다.

 

군수는 속으로 '공부한다는 중들의 자세가 이럴수가 있나. 한번 혼짝을 내주리라.' 생각하고 돌아갔는데, 며칠 뒤에 쌍계사에 편지를 보내 '귀사(貴寺)道人이 많다는데 목마(木馬)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동헌(東軒)마당에서 한번 타고 돌도록 하라. 만일 木馬를 잘 타면 후한 상을 내리겠거니와 그렇지 못할 때는 큰 벌을 주리라.' 하였다.

 

쌍계사에서는 놀라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였지만 묘안이 없어 모두 침울해 있는데, 탁자 밑에서 한 사미승이 나오더니 '그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스님들은 아무 걱정마시고 싸리채나 엮어서 木馬 한마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달리 방법도 없어 소년의 말대로 하동군청까지 부목을 시켜 사미승을 따라가게 하였다.

 

군수는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으나 사미승의 태도가 하도 당당하고 의젓한지라

'그렇다면 네가 木馬를 타기 전에 물어보겠다. 七佛庵道人들이 많다더니 내가 그 앉아 졸고있는 꼴들을 보니 한심하더라.'

'道人이라고 따로 별다른 모습을 하고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하늘을 쳐다보고 졸고만 있는 것이 무슨 공부란 말이냐?'

'그것은 앙천성수관(仰天星宿觀)입지요. 즉 하늘을 보고 별들을 관찰하는 공부입니다.'

 

'별은 왜 보는 것이냐?'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하달지리(下達地理) 하여야만 천하만사(天下萬事)를 다 알게되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머리를 푹 숙이고 땅을 보고 조는 ?'

', 그것은 지하망명관(地下亡命觀)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죽으면 지옥으로 가서 죄값을 치르게 되는데,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구제할 것인가를 하는 공부입니다.'

 

'그럼 몸도 가누지 못하고 흔들거리면서 쓰러지려는 듯 하는 것은 뭐냐?'

', 그것은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이라 합니다. 에 집착해도 안되고 에 집착해도 못쓰며, 고락성쇠(苦樂盛衰)에 집착해도 아니되므로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휘날려도 전후좌우 그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는 것처럼 공유달관(空有達觀)하는 공부이지요.'

 

'그건 그렇다 치고, 방구를 팅팅 뀌고 앉아있는 중은 또 무슨 꼴이냐?'

'그것은 타파칠통관(打破漆筒觀)인데, 사람이 우직하여 남의 말은 듣지 아니하고 제 고집대로만 하는 사또와 같은 칠통배를 깨닫게 하는 공부입니다.'

 

사또는 '허어, 이놈이!' 하면서 '아직 입에 젖냄새가 가시지 않은 너의 식견(識見)이 이러하니 그곳의 도승(道僧)들이야 말할게 있겠느냐. , 이제 木馬나 한번 타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사미승이 木馬에 올라 발을 한번 내구르니 말이 터벅터벅 동헌 앞마당을 대여섯번 돌더니 그만 공중(空中)으로 둥실둥실 떠올라서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군수와 육방관속들이 발심(發心)하게 되고 쌍계사와 칠불암을 생불주처(生佛住處)처럼 떠받드니, 군민이 모두 따라 일시에 하동(河東)은 불해(佛海)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옛적부터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인 칠불사는 아쉽게도 6·25전란으로 불타버리고 그 이후 얼마동안 초가집으로 맥을 이어왔는데, 통광스님이 지금의 모습으로 가꾸어왔다.

 

지금도 칠불사 선원(禪院)에 입방(入房)할려면 10:1이 넘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다.

 

통광스님이 탄허스님 아래에서 공부를 할 때, '자네는 관상이 돈 하고는 거리가 머니 무슨 불사(佛事)니 포교(布敎)니 하는 것은 하지말고 공부나 하고 참선이나 하는 중으로 살아라.' 라는 말을 듣고는 칠불사에서 참선이나 하면서 조용하게 살려고 했는데, 경봉스님이 '자네가 아니면 이 절을 복원할 사람이 없네.' '자네만이 이 절을 복원할 수 있다네!' 하는 명령조의 말씀을 몇번 듣고는, '어떻게 하면 복원할 수 있겠습니까?' 물었더란다.

 

그랬더니 홍련암에서 삼칠일(21) 기도를 하고 보리암에서 칠일 기도를 하고오라고 해서 거의 잠을 자지않고 홍련암·보리암 기도를 마치고 칠불사에 와서 다시 일주일간 불철주야 기도를 했는데, 회향할 즈음에 깜빡 조는 사이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서 무엇인가 한 꾸러미 주길래 받아보니 열쇠뭉치였으며, '복원할려면 십년넘게 걸릴 것이다!' 라는 소리를 들려주었는데 그때 스님은 잠이 깼단다.

 

그 이후에 일은 잘 진척되어 복원하는데 약 15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통광(通光)스님의 말에 의하면

 

"기도가 지극하면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맑아지면 마음눈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하게 되고

통하게 되면 빛이 난다" 고 하였다.

 

이것은 곧 기도가 지극하면 사람의 관상(觀相)과 팔자(八字)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기도는 상식을 초월한다.

그 다음날 우리는 쌍계사(雙磎寺)와 지장도량 천은사(泉隱寺)에 참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